[필자 참여] 갤러리팩토리 [여기라는 신호] 도록

*조은비 큐레이터의 기획전 [여기라는 신호]에서 이제 작가와의 대화에 패널로 참여했었다. 그 후 이제의 그림에 관한 짧은 글을 썼고, 도록에 수록되었다.
*사진 출처 : 갤러리 팩토리 홈페이지 http://factory483.org/publication/2743 

<딸 가진 엄마 – 페미니즘 이슈 – 이제의 그림 속 여자들>

거울을 열고 들어가니

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계시고

거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

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 앉으셨고

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

거울 안에 외증조할머니 웃고 계시고

[……]

순간 􏰀든 거울들 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며 깨어지며 한 어머니를 토해내니

흰 옷 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

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감은

􏰀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

조그만 어머니를 들어올리며

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!

*김혜순의 시 <딸을 낳던 날의 기억>에서 일부 발췌

  2015년 여름을 기점으로 내 삶은 달라졌다. 나에게 딸이 생긴 것이다. 나는 딸 가진 엄마가 되었다. 공교롭게도 그 해 내내 전 세계는 페미니즘 이슈로 뜨거웠 다. 국내에서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“#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” 선언에서부터 메르스 갤러리(메갤)의 미러링 스피치(mirroring speech)운동, 최근 ‘소라넷’ 사이트에 대 한 반대 운동까지 어떤 새로운 흐름이 페미니즘 이슈를 뒷받침해왔다. 그리고 미술 에서는 조금은 차분한 􏰁소리로 ‘여성적인 것’을 이야기하는 전시, <여기라는 신 호>가 있었다. 전시에서 전면으로 페미니즘을 화두로 올리고 있지는 않지만, 내가 참여했던 이제 작가와의 토크에서는 ‘여성적인 것’이 대화를 이어가는 열쇳말로 작용했었다.

  사적인 고백을 한 가지 해 보자면, 요즘 나는 불안증을 앓고 있다. 그것은 내게 딸이 생겼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 지독한 걱정으로, 임신한 후로 나의 머릿속에서 점점 자라나서 이제는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. 그리고 그 걱정과 불안은 지난해 페미니즘 이슈와 함께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 되었다. 그런 와중에 <여기라는 신호>에 걸린 이제의 그림에는 그런 나의 감정에 강하게 밀착하며 다가오는 어떤 공감대 같은 것이 있었다. 말하자면 ‘딸 가진 엄마 – 페미니즘 이슈 – 이제의 그림 속 여자들’의 구도로 설명될 수 있을 어떤 트라이앵글이 내 마음에 형성된 것이다.

  이제의 네 개의 인물화는 각각 한 명의 여자를 담고 있다. 그리고 그 여자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자신들과 나(관객) 사이에 응시의 공간을 형성하면서, 그 공간을 두고 이쪽과 저쪽에 있게 되는 것 같았다. 그리고 그 공간이란, 어쩌면 여성이기에 가능한, 가능하다기보다는 필연적인, 필연적이라기보다는 절박한 바리데기적 공간처럼 보였다. 누군가에 의해서 배제, 억압, 차별받게 되는 여성적 위치에서 그러한 근본적인 􏰀순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야 하는 주체들의 머뭇거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. 언젠가 나 또한 그림 속의 여자들처럼 연약하고, 위태로운 􏰀모습을 하고 누군가로부터 나 자신을 􏰂멀리하고자 했던 지나간 어느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, 또 언젠가는 저 여자들과 비슷한 표정을 하게 될 내 딸의 어느 날이 상상이 되기도 하였다. 딸 가진 엄마로서의 막연한 걱정과 불안은 어떻게 보면 가장 􏰀모호하고 주관적인 것으로 비출 수도 있으나, 이제의 그림은 마치 나의 이러한 불안을 공감한다는 듯이 그렇게 네 여자의 􏰀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.

  하지만 나의 불안이 내면으로 파고들어 어둡게 움츠러드는 것과는 달리, 그림 속 여자들의 시선은 비록 연약하고 위태로울지언정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어떤 대가도 견딜 수 있다는 듯이 결연하고 동시에 필사적이었다. 그러고 보면, 이제의 그림에서 여성들이 반딧불이처럼 놓치기 힘든 빛을 발산했던 것은, 비단 <여기라는 신호> 전시에서만이 아니었다.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로 고집스럽게 이 쪽을 쳐다보는 여자의 􏰀모습에서, 벌거벗은 임신한 여자의 􏰀모습에서, 필경 여자의 것이리라 여􏰃겨지는 폐허를 배경으로 뻗은 가느다란 팔에서, 난장판이 된 바닥에 마치 떠 있는 듯 서 있는 두 발에서, 희미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또렷한 반딧불이와 같은 여성들의 신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.

  직선적이고, 단언하고, 강경한 남성적인 􏰁소리들 틈에서 이제의 그림 속 여자들은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는 여성적인 응시의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. 이제가 그린 여자들의 몸짓은 나의 어머니가, 어머니의 어머니가, 할머니의 어머니가, 증조 할머니의 어머니가 􏰄었을 바리데기적 아픔을 위로하며, 동시에 내 딸, 내 딸의 딸, 손녀의 딸, 증손녀의 딸들의 저항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. 이제는 그 시선을 완결된 형용사적 묘사로서 그려내지 않고 일종의 동사로서 그려내어, 여자들의 시선 너머로 어떤 여성적 태도로서의 신호를 전달하고 있는 듯했다.

  어느새 해가 바뀌어 새로운 쟁점들이 이슈가 되고 있다. 전시는 막을 내려 더 이상 이제의 그림들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. 하지만 딸 가진 엄마로서의 염려하는 마음만은 갈수록 그 정도가 커지게 될지도 􏰀모르겠다. 시대를 거스르는 듯한 남성적 폭력과 억압, 차별이 없었다면 페미니즘 이슈가 재점화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. 혼잡한 상황에서 오히려 후- 하고 숨을 한번 고르듯이, 이제의 그림 속 여자들 처럼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여성적인 신호가 필요한 순간이다. | 글:윤민화

yun minhwa에 관하여

Curates/ Exhibition Dep. Seoul Museum of Art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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